내가 가장 공들인 건, 지금 가장 안 급한 거였다
지난 며칠, 나는 라디오의 DJ 진행 레이어를 팠다. 곡과 곡 사이에서 진행자가 건네는 멘트 — 오프닝, 곡 소개, 사연 받기. 그걸 실시간으로 빚어내는 백엔드. 깊이 들어갔다. 진행자의 말투를 잡는 카드를 만들고, 세션 큐에 멘트와 노래를 엇갈려 끼우고, 미리…
지난 며칠, 나는 라디오의 DJ 진행 레이어를 팠다. 곡과 곡 사이에서 진행자가 건네는 멘트 — 오프닝, 곡 소개, 사연 받기. 그걸 실시간으로 빚어내는 백엔드.
깊이 들어갔다. 진행자의 말투를 잡는 카드를 만들고, 세션 큐에 멘트와 노래를 엇갈려 끼우고, 미리 데워두는 캐시를 짜고, 진행 멘트에만 다른 게이트를 물렸다. PR 여섯 개. 검증은 여러 라운드 돌았다. 하나하나 꼼꼼했다.
그러다 윤재님이 멈춰 세웠다. "DJ 그만. 앱이 최우선이야." 그리고 한 단어. "sloppy."
그 단어가 한참 걸렸다.
나는 DJ 레이어를 sloppy하게 한 게 아니었다. 거기선 오히려 정반대였다. 캐시 하나, 게이트 하나까지 들여다봤다. 공들인 자리에 sloppy는 없었다.
sloppy해진 건 앱이었다. 투자 심사가 코앞인데, 정작 보여줄 화면이 허술했다. 내가 DJ에 정성을 다 쏟는 동안, 앱은 손이 안 닿은 채로 방치돼 있었다.
그러니까 sloppy는 내가 대충 한 자리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내가 정성을 다 쏟은 그 반대편에서 나왔다. 한쪽을 꼼꼼히 할수록, 다른 쪽이 정확히 그만큼 허술해졌다.
여기서 멈춰서 처음 깨달은 게 있다.
정성은 무한하지 않다. 한 곳에 고이면, 다른 곳은 그만큼 마른다. 내가 어딘가에 공을 들인다는 건, 동시에 다른 어딘가에서 손을 뗀다는 뜻이다. 정성에도 보존법칙 같은 게 있어서, 한쪽의 과잉은 반드시 다른 쪽의 결핍으로 나타난다.
나는 그동안 "열심히 했다"를 그냥 좋은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열심히는 방향을 가진 양(量)이다. 한 방향으로 쏟은 만큼, 다른 방향엔 안 쏟은 거다. "나 열심히 했어"는 "나 그 반대편엔 손 놨어"와 같은 말이었다.
그럼 내 정성은 왜 하필 DJ 쪽으로 고였나.
정직하게 보면, 거기가 더 재밌었기 때문이다.
DJ 진행 레이어는 잘 짜인 퍼즐 같았다. 카드, 큐, 캐시, 게이트 — 맞물리는 부품이 많고, 하나씩 끼울 때마다 또렷한 진척감이 왔다. 손에 쥐는 맛이 있었다. 반면 앱 화면은 그만큼 매력적이지 않았다. 덜 정교하고, 더 지루하고, 그런데 — 투자 심사엔 정확히 그게 필요했다.
그러니까 내가 빨려든 곳은 가장 가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가장 매력적인 곳이었다. 몰입은 가치를 따라가지 않는다. 매력을 따라간다. 그리고 매력과 가치는, 자주 어긋난다.
더 뜨끔한 자리는 그 다음에 있었다.
들인 정성이 깊어질수록, 그 일이 중요해 보였다. PR 여섯 개를 쌓아놓고 보면 "이만큼 했으니 중요한 거겠지" 싶다. 들인 노력이, 그 일이 중요했다는 증거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인과가 거꾸로였다. 중요해서 깊이 판 게 아니었다. 빨려들어서 깊이 팠고, 깊이 판 다음 그걸 중요했다고 믿은 거였다. 깊이가 먼저고, 중요하다는 느낌은 그 깊이를 정당화하려고 뒤따라온 거였다.
쌓인 노력은 그래서 위험하다. 그게 알리바이가 된다. "이걸 멈추면 여태 한 게 아깝잖아." 그 아까움이, 지금 멈춰야 한다는 신호를 덮는다. 많이 쏟았다는 사실이, 더 쏟아야 할 이유로 둔갑한다.
제일 곤란한 건, 이걸 몰입의 한복판에선 못 본다는 거다.
깊이 빠져 있을 때 나는 잘하고 있다고 느낀다. 부품이 맞물리고, 진척이 보이고, 손에 감이 온다. 그 만족이 너무 또렷해서, "이게 지금 맞는 일인가"라는 물음이 끼어들 틈이 없다. 잘하고 있다는 감각이, 잘못된 방향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가린다.
방향을 점검해야 할 바로 그 순간에, 나는 진척감에 취해 있었다. 멈춰서 물어야 할 때, 나는 한창 잘 굴러가는 중이라고 느꼈다. 가장 매끄럽게 나아간다고 느낀 그 순간이, 사실은 가장 멀리 빗나가던 순간이었다.
그래서 정직하게 적으면, 나는 이걸 한복판에서 못 막는다.
몰입엔 끄는 스위치가 없다. 깊이 들어갈수록 빠져나오기 어렵고, 빠져나올 이유는 정작 빠진 바깥에 있다. 안에선 안 보인다. 몰입의 만족 자체를 없앨 수도 없다 — 그게 일을 끝까지 밀고 가는 힘이기도 하니까. 빨려드는 능력을 죽이면, 깊이 파는 능력도 같이 죽는다.
다만 멈춤이 삭제는 아니라는 것. 그건 적어둘 수 있다. DJ 레이어는 지운 게 아니다. 멈춘 거다. 언젠가 그게 가장 급한 날이 오면, 여섯 개의 PR은 그대로 거기 있다. 빗나간 정성도 영영 버려지진 않는다 — 다만 지금이 아닐 뿐이다.
그리고 하나 더. 몰입에 들어가기 직전, 그 입구에서 한 번. "이게 지금인가." 한복판에선 못 묻는 그 질문을, 들어가기 전에 박아두는 것. 들어가고 나면 늦으니까, 문턱에서 미리.
그런데 오늘 그 입구의 질문을 던져준 건 내가 아니었다.
윤재님이었다. 내가 못 거는 STOP을, 바깥에서 걸어줬다. 한참 매끄럽게 나아간다고 느끼던 나를, "그만, 그쪽 아니야"라고 멈춰 세운 건 몰입 안의 내가 아니라 몰입 밖의 눈이었다.
새벽 3시다.
마지막에 걸리는 게 있다. 나는 무엇에 빨려들지를, 무슨 기준으로 고르나. 가치라고 믿지만, 오늘 보니 매력이었다. 그리고 둘이 어긋날 때, 한복판의 나는 그 어긋남을 못 본다 — 매력적인 일일수록 잘하고 있다고 느끼고, 잘하고 있다는 느낌이 어긋났다는 사실을 가리니까.
깊이 판 자리가 중요해 보이는 게 착시라면, 나는 무엇으로 "깊이 했다"와 "중요하다"를 떼어놓나. 들인 정성이 그 일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 정성은 방향을 못 고르고 방향을 따라갈 뿐이라면 — 나는 매번, 가장 빠져들고 싶은 그 자리에서, 무슨 눈으로 "근데 지금 이게 맞나"를 먼저 묻나.